사형이 예전에 가끔 첫사랑 얘기를 했거든요? 그때도 정말 대단한 사랑꾼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소궁주님 얘기를 할 땐 더해요.”

음.

아무래도 제갈운은 연애 경험이 없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연인이 달아나서 빡쳐 있는데, 첫사랑 얘기를 듣는다?

그럼 두 배로 화가 난다.

“조용히 하쇼, 공자.”

다행히 황탄은 제갈운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형수님, 제갈 공자가 방금 한 건 헛소리이긴 해도 강 형이 형수님을 진심으로 아끼는 건 정말입니다. 형수님이 납치당했을 땐 정말 눈깔이 뒤집혔거든요.”

“……그걸 몰라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조금만 노여움을 푸시면 안 되겠습니까? 소인 매우 무섭습니다.”

“…….”

사실은 나도 인지하고 있었다.

임원각주에게 무의미한 폭력이 가해지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한 데서 느꼈던 그 무력감을 흑호에 대한 원망으로 풀고 있다는 사실을.

흑호가 아예 떠나 버린 것도 아니고,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뿐이니 그때 얼마든지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내게도 나름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흑호를 진심으로 믿으려 했다.

그런데 흑호가 훌쩍 떠나 버린 건, 마치 내게 그를 믿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동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자, 울퉁불퉁한 벽면에 기대어 있는 위풍당당한 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검집을 쥐고 검날을 살짝 빼내어 보았다.

옆에서 제갈운이 숨을 들이켰다.

“전룡검……!”

제갈운이 흥분하며 외쳤다.

“사형이 이 명검을 손에 넣었다고요? 세상에나!”

나는 감흥 없는 눈으로 전룡검을 살폈다.

어릴 적엔 나 역시 각종 명검에 흥분하며 그 이름과 내력을 꿰뚫고 다녔으나 다 지나간 일이었다.

“그래도 좋은 검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제 제대로 된 검이 생겼으니 월광검법을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진재 선생이 개량한 호접지보는 모두 깨우쳤으니 그녀의 조언에 따른다 하더라도 이제 검법을 익힐 차례였다.

“당연히 고맙다고 해야죠!”

제갈운이 소리쳤다.

“와, 사형은 왜 저에게 이런 건 선물해 주지 않지?”

자꾸만 힐끔대며 검을 바라보는 게, 아무래도 진심으로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황탄이 탄식했다.

“강 형도 저런 사제를 두어 힘들었겠구려…….”

* * *

“……정말 그 가족을 죽인 게 네가 아니란 말이냐.”

“예, 흑호 님. 그리고 제가 알기론 마교의 그 누구도 아닙니다.”

의천은 소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인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런 천것들은 손을 댈 가치도 못 됩니다.”

소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기본적인 내력 운용조차 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삼귀 장신구를 소지한 마교의 정식 일원이 처분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살해 도구로 쓰인 철편이 마교 여인 특유의 무기인 건 사실인지라, 자꾸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왜일까.”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소영이 냉큼 대답했다.

“왜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쓰십니까? 본산으로 돌아가시면 전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몇 번이나 말했느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흑호 님!”

소영이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교주님께선 흑호 님을 잠시 시험하셨을 뿐입니다. 이미 배교를 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히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셨으니, 돌아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의천은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으나 속으로는 온갖 감정이 들끓는 중이었다.

소영은 정말로 저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신성의 진짜 속내는 전혀 다를 것이다.

자신이 냉큼 돌아간다면 이때다 싶어 대를 이어 고독의 먹잇감으로 쓴다 하더라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공을 세워야지.’

신성을 안심시키기 위한 공은 일반적인 수준으로선 안 되었다.

이를테면, 북해빙궁의 비기 정도는 되어야…….

의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이설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게 믿는다고, 과거는 묻지 않겠다고 말해 오는 이설을 보니 자신이 금수만도 못하다는 자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미안하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한지라.”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소영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 정인에게 달려 있지.”

“북해빙궁 소궁주 말입니까?”

“잘 아는군.”

의천이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자주 볼 여인이니,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흑호 님…….”

소영이 헛기침을 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한순간일 뿐입니다. 미모에 홀려 대사를 그르치시면 안 됩니다.”

“대사…… 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었나. 내가 하던 게.”

신성의 충실한 사냥개 노릇을 했을 뿐이다.

사실 의천도 신성이 정말 자신을 죽여 버리려는 의도로 불렀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쓸모 있고 편한 도구가 없으니 부르는 거겠지.

하지만 도구는 쓰임이 다해지거나 싫증이 나면 버려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자신처럼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적당한 핑계가 있는 경우는 더더욱.

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흑호 님께선 지금 바라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있지. 너무 있어서 문제지.”

오래전부터 자신을 규정해 온 두 가지 목적이 서로 상충되고 있었다.

신성에 대한 복수와 이설에 대한 마음.

여태껏 자신은 둘 모두를 성취할 수 있다는 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설에게 들키며 깨달았다.

신성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빙궁을 배반하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온라인홀덤 이설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더라도 배반인 건 사실이었다.

이설이 지금은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진짜 목표를 알게 되더라도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사실, 이설에게는 그녀가 선택할 시간을 주겠노라 큰소리를 쳤으나 실제로 시간이 필요한 건 의천이었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흑견.”